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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시인-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날짜 2010-05-18 00:14:51 조회 457 추천 0
이경자

슬픔도 가꾸면 재산이 된다 / 김영남

 

 

귀하게 얻은 슬픔이란
뿌리가 잘 썩는 분재 같아
고운 흙으로 분갈이를 해주지 않으면
내부 공간을 심하게 망가뜨린다.

 

따라서 내부 공간을 가꾸기 위해서는
보습용 물레방아, 흔들의자를 들여놓고
대(竹)발로 밖을 차단해 놓은
마음의 베란다 한 켠이 필요하다.
자주 눈길을 주며, 웃자라거나
삐져자란 슬픔을 다듬을 수 있도록
예쁜 창도
안으로 달아놓아야 한다.

 

잘 보살핀 슬픔, 옹이가 곱게 앉은 슬픔이란
거실, 현관, 정원, 옥상 어디에 내놔도
주변을 깊고 넓게 변하게 한다. 값 비싼 난(蘭)처럼
진한 향기를 감돌게 하고, 조용한 숲속으로 바꾸어준다.

 

저기, 슬픔을 방치해
내부 공간이 헛간처럼 망가진 사람이
내부 공간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밑에 관하여 / 김영남

 

 

나는 위보다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
그 탄탄한 밑동을 사랑한다

 

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밑동도 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

참나무처럼 튼튼한 사람,

그 사람 밑을 내려가 보면

넓은 뿌리가 바닥을

악착같이 끌어 안고 있다

 

밑을 잘 다지고 가꾸는 사람들 ……
우리도 밑을

논밭처럼 잘 일궈야 똑바로 설 수 있다

가로수처럼 확실한 밑을 믿고

대로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거리에서 명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밑이 구린 것들, 밑이 썩은 것들은

내일로 얼굴을 내밀 수 없고

옆 사람에게도 가지를 칠 수 없다

 

나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
그 근본을 사랑한다

근본이 없어도

근본을 이루려는 아랫도리를 사랑한다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에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 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 가 저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으로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 가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고렇게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한번도 터지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겨도 이 세상까지 모두 흡수해 버리는
포용력 큰 불발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 김영남

 


나는 누워만 있는 것을 보면 올라가보고 싶다.
그 누워 있는 것들에 신나게 올라가서
한번 가쁜 숨을 매몰차게 몰아쉬고 싶다.

 

가쁜 숨을
기쁘게
내쉴 것들을 고르다 보니,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워 있는 침대, 누워 있는 천장, 누워 있는 하늘…
저기 한 여자도
한사코 누워만 있는 바위를 올라타느라
가쁜 숨을
크게 내뿜고 있다.
여자가 슬슬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니까
귀엽다.
용감해 보인다.
아니, 불행해 보인다.
세상에!

오죽했으면 여자가 하늘을 올라타야 할까?

 

나는 누워 잠자는 걸 보면 꼭 한번 올라타 보고 싶다.
누워 있는 상사,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

 

 

 

 

김영남 시인
1957 전남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 출생 
1985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97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정동진역> 당선으로 등단 
1998 시집 '정동진역(민음사)'
1998   윤동주 문학상(우수상)수상 
2001 시집 '모슬포 사랑'(문학동네)
2002   중앙문학상 수상
2004   문학과 창작 작품상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기획조정실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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