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편의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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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시인 -대패삽겹살
날짜 2010-05-18 00:52:08 조회 503 추천 0
이경자
1>재활용/김기택-

 

 

 

지하상가 입구 한 구석에 쓰레기가 쌓여 있다.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는다.

지나가던 캔과 담배꽁초와 가래침만 더 쌓인다.

파리 모기가 냄새에 미쳐 앵앵거린다.

발들이 멀찌감치 돌아간다.

 

 

하는 수 없이 쓰레기가 꿈틀거리더니

구겨진 넝마조각과 휴지들이

서로 끌어안고 스스로 팔다리가 되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스스로를 재활용하러 또 어딘가로 떠난다.

 

 

이미 폐품이 되어버린 고물덩어리를

제 몸으로 사용하기.

쓰레기로 숨 쉬기.

마지못해 밥을 씹어 그 쓰레기를 꿈지럭거리게 하기.

눕자마자 바로 쓰레기더미가 되기.

 

 

모든 쓰레기들의 잠을 깨우며

새벽 쓰레기수거차가 온다.

종량제봉투에 담긴 쓰레기만 수거하고 간다.

지하상가 입구 한 구석에 여전히 쓰레기가 쌓여 있다.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는다.

 

<2>-대패삼겹살/김기택-

 

 

 

 

 

 

 

대패로 깎아 무얼 만들겠다는 거지?

100% 돼지로 만든 식탁

삼겹살과 핏줄과 신경의 무늬가 생생한 책장과 장롱

숨 쉬는 통돼지로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들어

친환경이라는 목조 주택

신문에 끼어 온 전단지에서 본 그 광고들인가?

 

 

전기톱은 깊은 숲으로 가서

아름드리 라지화이트종 한 마리를 골라 베었겠네

잎과 가지가 다 흔들리도록 비명을 지르다

그루터기만 남기고 돼지는 풀썩 쓰러졌겠네

고소한 비린내가 나무향이 되도록

사방으로 튀던 피와 비명이 무늬목이 되도록

얼마나 오랫동안

대패는 그 돼지를 쓰다듬고 핥으며 길들였을까

 

 

건강에는 역시 채식이 최고야

성인병도 예방하고 환경도 살리는 웰빙 음식 아닌가

가구나 집이 지겨워지면

미련 없이 부수어 불판 위에 올리게

구워지면서 나무는 비로소 돼지고기가 된다네

참 오래 살고 볼일이구먼

이 생생한 삼겹 나이테살 좀 보게

이토록 완벽한 돼지고기맛 퓨전 채식을 먹게 되리라고

예전에 누가 꿈이라도 꾸어보았겠나

 

<3>-손톱/김기택-

 

 

 

 

 

 

 

방금 전에 분명히 깎은 것 같은데

손톱이 벌써 길게 자라 있다.

그동안 잘라냈던 자리를 다 밀어내고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있다.

초침 지나간 자리처럼 빈틈이 없다.

손톱이 있던 자리에 수많은 눈금이 새겨져 있다.

잘라낸 손톱 길이만큼 딸아이가 자라 있다.

딸아이가 보는 동안에도

손톱은 딸아이 키만큼 또 자라고 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손톱 자라는 속도를 쫓아갈 수 없다.

손톱 자라는 속도에 맞추느라

나는 또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

신호등마다 정류장마다 서는 답답한 속도에 화를 내며

택시로 갈아탄다.

손톱 자라는 속도를 먹여 살리느라

출근하고 침 튀기며 말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친절한 웃음을 다하여 전화를 한다.

이 정도면 꽤 헐떡거리며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달력을 넘기자마자

또 한껏 자라있는 손톱이 보인다.

전에 깎아낸 길이보다 더 길게 자라 있다.

한 번도 안 깎은 것처럼 자라 있다.

할퀼 것도 없는데 긴 날을 세우고 있다.

잠깐 전화 받고 나서 보면 그 자리에 또 있다.

거울 안에서도 자라 있고

양말을 벗을 때마다 발가락에도 자라 있고

아침에 눈 뜨면 해처럼 둥글게 솟아있다.

세수하다 손톱을 보고 내 입은 또 쩍 벌어진다.

아이쿠, 또 늦었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니!

 

<4>-할여으에어/김기택-

 

 

 

 

 

 

불이 살을 녹여 얼굴을 지우고

손가락 발가락을 지우고

콧구멍을 막았다

병원이

녹은 얼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

호흡만 겨우 이어놓았다

녹은 살 속에 숨어서

벌겋게 벌거벗은 한 사람이

두 손으로 '불'알을 꼭 가리고 웅크려

신음하고 있었다

(얼마나 깊고 어두울까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그 속은)

익어버린 혀가 침묵하는 동안

신음은 컴컴한 바람소리의 힘으로

간신히 발음 하나를 만들었다

할여으에어

 

 

고기냄새가 난다

불판 위에서 맹렬하게 들썩거리는 소리가 난다

지독한 발음냄새가 난다

살려주세요

 

<5>-모녀/김기택-

 

 

 

 

 

 

딸의 얼굴이 조금 들어가 있는 엄마가

소곤소곤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딸이 엄마의 웃음을 똑같이 그리며 웃고 있다.

두 웃음이 하나의 얼굴에서 웃는다.

엄마가 나직나직 이야기할 때

두 얼굴은 모두 엄마가 되었다가

딸이 생글생글 이야기하면

두 얼굴은 금방 명랑한 딸의 얼굴이 되곤 한다.

두 몸에서 나온 하나의 얼굴.

두 얼굴에 맞붙어 있는 한 눈, 한 웃음.

한 웃음 속의 두 입, 두 웃음소리.

서로 단단하게 붙어있는, 둘로 갈라져버리면

바로 피가 날 것 같은 하나의 얼굴.

한 입으로 이야기하고

한 고개로 끄덕이는 두 얼굴.

엄마의 웃음 속에 있는 딸이 이야기하자

딸 속의 엄마가 무릎을 치며 맞장구친다.

딸의 웃음 속에 들어있는 엄마가 이야기하자

엄마 속의 딸이 까르르 웃는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엄마는

저도 모르게 40대의 딸이 되어서는

응, 응? 응, 고개를 끄덕이며 어린 대답을 한다.

딸 속의 엄마는 엄마 속의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인자한 웃음을 보낸다.

슬픔이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도록 명랑한

둘로 갈라진 자국이 없는

하나의 눈, 하나의 코, 하나의 얼굴.

조마조마하도록 가만히 소곤거리는,

하나가 없어진다면

둘 다 영원히 없어져버리고 말 것 같은

10대 엄마와 40대 딸.

 

<6>-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김기택-

 

 

 

 

 

 

 

눈빛으로

목구멍이 막혀 눈빛으로

손발이 테이프로 꽁꽁 묶여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건 눈 하나밖에 없어 눈빛으로

막힌 목구멍 대신 눈동자를 뚫고 나올 것 같은 비명으로

눈구덩이로 튀어나온 심장 같은 벌건 눈알로

살갗을 울퉁불퉁 뒤틀며 찢고 나올 것 같은 근육으로

숨 막힌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한껏 벌어져 있는 입으로

공기 한 방울 맛보려고 입 밖으로 길게 빠져나오는 혀로

그 입에서 눈물처럼 뚝뚝 흘러나오는 침으로

빨간 루주를 칠했는데도 점점 새파래지는 입술로

방금 성폭행 당한 요도(尿道)에서 나오는 뜨거운 오줌으로

팬티와 치마와 에쿠스 시트가 다 젖는 줄도 모르는 떨림으로

목 조르는 팔뚝 속으로 스며드는 월척 같은 파닥거림으로

그 꿈틀거림으로 더욱 짜릿해져가고 있을 손맛으로

그 손맛 때문에 더욱 단단하게 조여지고 있을 모가지로

아무리 격렬하게 발버둥 쳐도 고요하기만 한 모가지로

빨간 스타킹 자국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모가지로

 

<7>-구직/김기택-

 

 

 

 

여러 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졌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 되면 미련 없이 거둬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대중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렁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 번 입어 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 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성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고쳐주는 세상 아닌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 번 나을 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닷없이 울컥 치밀어 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 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 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불에 덴 저 조개들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젓가락과 이빨들이 와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이 있지 않는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

 

<8>-커다란 나무/김기택-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몸을 찢으며 갈라진다

찢어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오래 전부터 갈라져 있던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너무 많이 가보아서 훤히 알고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튀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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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꼽추」당선
시집
1992년『태아의 잠』
1994년『바늘구멍 속의 폭풍』
1999년『사무원』
2005년『소』
1995년 김수영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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