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편의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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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목시인-거리의시간
날짜 2010-05-25 05:50:10 조회 480 추천 0
이경자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全景)보다

더 많다. 더러는 건물이 마빡이나 심장

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 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 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

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

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새                                                        

 

 커튼 한쪽의 쇠고리를 털털털 왼쪽으로 잡아당긴다 세계의 일부가 차단된

다 그 세계의 일부가 방 안의 光度를 가져가버린다 액자속에 담아놓은 세계

의 그림도 명징성을 박탈당한다 내 안이 반쯤 닫힌다 닫힌 커튼의 하복부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다른 한쪽 커튼을 쥐고 있는 내 손이 아직 닫히지 않

고 열려 있는 세계에 노출되어 있다 그 세계에 사는 맞은편의 사람들이 보

이지 않는다 집의 門들이 닫혀 있다 열린 세계의 닫힌 창이 하늘을 내 앞으

로 반사한다 태양이 없는 파란 공간이다 그래도 눈부시다 낯선 새 한 마리

가 울지 않고 다리를 숨기고 그곳에 묻힌다 봉분 없는 하늘이 아름답다


 거리의 시간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사내가

간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뒷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의 모가지 하나가

여러 사내 어깨 사이에 끼인다

급히 여자가 자기의 모가지를 남의 몸에

붙인다 두 발짝 가더니 다시

사람들을 비키며 제자리에 붙인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여자의

핸드백과 한 여자의 아랫도리 사이

하얀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주전자가 올라붙는다 마리아의 한쪽 가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놀란 여자 하나

그 자리에 멈춘다 아스팔트가 꿈틀한다

꾹꾹 아스팔트를 제압하며 승용차가

간다 또 한 대 두 대의 트럭이

이런 사내와 저런 여자들을 썩썩 뭉개며

간다 사내와 여자들이 뭉개지며 감동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는 시간을 따로 잘라내어 만든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많은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사랑의 감옥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호수와 나무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와

귀는 접고 눈은 뜨고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개 한 마리

물가에 앉아 있다

 

사내는 턱을 허공에 박고

개는 사내의 그림자에 코를 박고

 

건너편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는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하늘과 두께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


 

 

 

 

오규원(吳圭原) / 본명 : 오규옥(吳圭沃)                                                      
1941 경남 밀양 출생. 
 동아대 법학과 졸업. 
1968 <현대문학>에 시<몇 개의 현상>이 추천되어 등단. 
1982 현대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저서명 부서명 총서명 출판사 출판년
시집 <분명한 사건(事件)>    한림출판사  1971
시집 <순례(巡禮)>    민음사  1973
시집 <사랑의 기교(技巧)>    민음사  1975
시집 <왕자(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 지성사  1978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抒情詩)>    문학과 지성사  1981
시집 <희망 만들며 살기>    지식산업사  1985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生)이고 싶다>    문학과 지성사  1987
수필집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잠시만 머문다>    문학사상사  1987
시집 <하늘 아래의 생(生)>    문학과 비평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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